어느 날/가쉽들...2013. 9. 1. 10:46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나치 독일 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핵심 사건으로 1933년 2월 27일 오후 9시 14분에 발생했다.

최초의 목격자는 국회의사당 근처를 지나가던 한 대학생 이였고, 그는 의사당을 지나던 중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했고다.  

베를린 소방대가 의사당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당은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으며,  소방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경찰은 불길이 여러 곳에서 수직으로 치솟으며 동시에 발화한 것을 발견했다. 이때 경찰은 발가벗고 건물 뒤에 움츠려 숨어 있던 마리뉘스 판 데르 루페를 발견했다. 루페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실직 벽돌공으로 그 당시 최근에 독일로 넘어온 상태였다. 발견 당시 루페는 방화용 도구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당시 국회의장),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 등이 곧 현장에 도착했고, 화재 현장을 보자마자 괴링은 즉각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선언했으며,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소리질렀다. 아직 화재 진압 중이었고, 괴링의 이 선언으로 화재 사건은 수사도 하기 전에 공산주의자들의 방화로 그냥 굳어졌다. 이때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 감상 중에 같이 현장으로 달려온 괴벨스도 그의 일기에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썼다고 한다.

히틀러는 비상 사태를 선언할 기회를 잡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1919년)의 인권 조항 대부분을 폐지하는 의회 방화에 비상사태법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나치 지도자들은 이 의회 방화 사건이 코민테른의 행위로 밝혀졌다고 주장했으며, 범인으로 나중에 "의회 방화 사건 재판"으로 알려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1933년 3월 초에 체포된 3명의 남자를 내세웠다. 이들의 이름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였다. 사실 이들을 체포한 프로이센 경찰은 이 불가리아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된다는 신고를 받고 체포했을 뿐으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체포하고 나서야 그들이 코민테른의 중요한 인물들임을 알았다. 당시 디미트로프는 서유럽 코민테른 활동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 방화사건의 배경

히틀러는 1930년 1월 30일에 연립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 수상이 된 직후 히틀러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회를 해산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해산 후 재선거를 통해 정부 내에 나치당 의석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총선거가 1933년 3월 5일로 잡혔다. 히틀러의 목적은 합법의 테두리에서 법적 모양새를 갖추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권위임법은 수상에게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법률을 의결할 수 있도록 바이마르 헌법에서 허용된 특별한 힘이었다. 전권위임법은 본래 극단적인 비상사태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고, 정부가 초인플레이션을 잡아 독일을 구하기 위해 사실 1923년 ~ 1924년에 딱 한 번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법을 활성화기 위해서는 의회 의석 수의 2/3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1933년 1월, 나치는 의석의 단 32%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의석 수로는 전권위임법을 가결하여 통과시킬 수가 없었다.

선거 기간 동안 나치는 독일에 공산주의 혁명이 임박했으며, 그걸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는 것뿐이라면서 신경질적 반공산주의 정강을 주장했다. 히틀러의 선거 강령은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나치의 의석 수를 더 늘려달라고 투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권위임법에 반대 투표를 할 수 있는 반대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히틀러는 독일 공산당(KPD,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추방을 계획했다. 당시 독일 공산당은 새 의회가 개회하기 전 선거 후에 의석 수의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사당 방화 사건은 히틀러에게 공산당 추방에 속도를 낼 수 있게 해주었고, 공산주의 혁명이 임박했다는 나치의 주장을 확인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나치는 의사당 방화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간주했고, 독일 국민들에게 공산당 통치 체제 하에서 겪을 소름끼칠 파멸에 대해 경고했다.

 

 

 

 

루페의 처형

재판에서 판 데어 루페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10일에 참수되었는데, 이 날은 그의 25번째 생일 3일 전이었다. 나치는 루페가 공산주의 음모가 집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 음모가 집단이 국회 의사당을 불태우고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치는 화재 다음 날 새벽부터 각지의 공산당 본부를 경찰과 돌격대를 동원하여 압수 수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봉기 음모를 입증하는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보되었다는 문서"들은 증거로써 재판정에 제출된 적도 없고, 공개된 적도 없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루페가 자신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나치 음모단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루페는 어떤 목소리가 나치 체제 하에서 독일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을 불태우자고 그에게 말했다면서 단독범행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에서 루페의 역할에 대한 논쟁

사가들은 대개 판 데어 루페가 의사당 화재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동의했다. 그렇지만, 피해 정도가 그가 혼자서 했다는 것에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화재가 건물에 퍼진 속도를 고려할 때, 명성에 굶주린 정신 불안 방화범이라는 판 데어 루페의 평판과 지도급 나치당 관계자의 애매한 논평이 나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관계했을 것이라고 믿게 하고 있다. 나치가 계획하고 실행한 다음, 판 데어 루페에게 뒤집어 씌워 공산당을 탄압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치나 공산주의자 모두 관계가 없고, 오직 판 데어 루페의 혼자서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나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루페가 "얼간이" 또는 "정신불안자"였다는 생각은 폭력적인 반파시스트와 거리를 두려 했던 공산당의 선전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한스 몸젠은 사건 당일 나치 지도자들이 패닉 상태였고, 그들이 공산혁명이 즉시 실제로일어날 것이라는 그들의 선전 활동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결론지었다.

 

 

 

 

현재의 독일 국회의사당 모습

 

 




Posted by 렐라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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