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가쉽들...2013. 11. 26. 08:49

 

 

 

 

영국 헨리 8세의 초상화를 뒤집으면 '사탄'의 형상이 보인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의 서머셋 주 한 가정집의 집 주인인 파웰 부부는 2년 전 응접실에서 이 벽화를 처음 발견했는데 당시에는 헨리8세의 실물 크기 벽화가 발견된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라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고 이 그림이 사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알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파웰 부부는 해당 벽화를 배경으로 제작된 우편엽서를 우연히 뒤집어 본 결과 사탄의 형상을 발견하게 됐고, 초상화를 거꾸로 뒤집어보면 기존 헨리8세의 두 손과 왕관 부분이 짐승의 뿔과 염소의 눈처럼 보이는데 이는 성경에서 묘사하는 타락 천사이자 지옥의 수장인 사탄(루시퍼)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고 파웰 부인은 사탄의 모습을 발견한 직후 불쾌했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소름끼치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벽화전문가인 캐서린 데이비스 박사는 "악마의 형상처럼 보인다"며 "굉장히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한 옥스퍼드대 교회사 전문가인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교수는 파웰 부부의 집이 16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저택으로 종교인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됐다는 점에 주목, 역사적 맥락에서 이 벽화를 해석했다.

 

맥클로흐 교수는 기본적으로 왕의 초상화는 충성의 의미로 제작된다. 하지만 헨리8세가 가톨릭을 부정하고 영국 국교회를 세우면서 많은 숙청이 진행됐고 따라서 비판 여론도 많았다. 이 초상화도 가톨릭을 부정한 헨리8세를 사탄으로 묘사한 풍자적 성격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유럽 그림 중에는 이런 풍자적 요소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헨리8세는 두 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세 명의 왕비를 내쫓는 등 개인사가 불행했던 왕으로 헨리8세가 1534년 수장령을 내리고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설립했던 이유도 자신의 정부였던 앤 블린과 결혼하고자 첫 왕비였던 캐서린과의 이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영국 국교회 설립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처형됐고 결국 헨리8세를 악마로 묘사하는 이런 '벽화'까지 등장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헨리 8세(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청년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으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형의 미망인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20년만에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이혼하였다. 캐서린 합스부르크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서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바티칸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설립하였다. 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所領)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두 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세 명의 왕비를 내쫓았으며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의 시종과 공신들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1][2]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로마 교황 대신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록 그가 임종하기까지 얼마간 영국 성공회 신자였다는 주장도 있고, 헨리 8세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 당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 동안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1][3]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참고-






Posted by 렐라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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